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독후감] [책추천] < 어떤 호소의 말들, 최은숙 >
    그믐🌚 독후감/그믐🌚 책 2022. 7. 26. 21:33

    어떤 호소의 말들
    : 인권위 조사관이 만난 사건 너머의 이야기
    33p. “이후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나는 유사한 장면을 숱하게 목격했다. 인권침해 사건이 발생하면 매시간 속보가 뜨고, 개선책을 마련하겠다며 떠들썩한 말잔치가 벌어지고,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지만 피해자들은 덩그러니 홀로 남겨졌다. 연극이 끝난 무대 위 소품처럼. 관객들은 집으로 돌아갔고, 무대는 어둠에 잠겼다.”

    50p. “2003년 박찬욱 감독은 찬드라의 사연을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었다. 그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인권침해에 고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따고 했다. 잔인한 고문을 행하거나 진실을 조작해 무고한 유학생을 간첩으로 만드는 것 같은 고의와 악의가 있는 인권 침해 사건들도 많지만, 그런 고의나 악의만이 인권침해 피해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사실 갈수록 무관심과 관행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인권침해가 더 늘어나고 있다. 찬드라의 인권침해 사건에 ‘참여’했던 경찰, 부녀자보호소 직원, 정신병원의 의사와 간호사 누구도 의도를 가지고 악행을 하지 않았다. 그냥 조금씩 무심했고 조금씩 무책임했을 뿐이었다. 찬드라의 외모가 한국인처럼 보였고, 한국말을 못했고, 행색이 초라했다는 것은 인권 보호의 이유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가해의 좋은 변명거리가 되었다.”

    84p. “사회역학자 김승섭은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인권침해와 차별의 고통이 어떻게 사람을 아프게 하는지 과학적 통계와 연구 자료로 증명해 보인다. ‘말하지 못한 상처’는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우리 몸에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새겨진다고 말한다. 노동자가 겪는 차별의 경험은 사람을 아프게 했다. 차별을 경험한 이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건강이 좋지 않음은 물론이고, 그중에서도 차별 경험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타인에게 말하지 못한 집단(주로 여성)이 더 많이 아픈 것으로 확인되었다.”

    110p. “어떻게든 버티며 존엄을 지켜가는 이들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것은 칼이 아니라 한마디 말이나 태도일 수 있다. 문제가 되면 별 뜻이 없었다고 해명되기 일쑤인 그 언동들은 사실 평소에 우리 안에 내재된 차별과 편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차별과 편견은 어떤 존재를 한순간에 투명인간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156p.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인권의 피해자들은 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무해한 존재이며, 선량한 시민이거나 무고한 희생자, 억울한 피해자였지만, 현실에서 만난 이들이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때때로 악랄하고 위선적이고 탐욕스러운 존재에 가까웠다. 그때마다 나는 놀라고 당황하며, 인권을 보호한다는 것에 대한 깊은 회의감에 빠지곤 한다. 인권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사람의 한계일 수도 있고 실제로 인권의 이념과 현실 사이에 까마득한 골짜기가 생긴 탓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들어 그 골짜기는 더 깊게만 느껴진다.”

    159p. “’삽질하기’같은 인권위의 일은 그래서 함께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포클레인 같은 힘은 없지만 여럿이, 천천히, 꾸준히, 한삽씩 뜨는 진정성이 있고, 그 힘으로도 길도 뚫고 산도 옮길 수 있다고 감히 믿는다. 고속도로를 두고 국도로 돌아가는 형국이지만, 이런 느림과 비효율은 인권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불가피한 시간과 비용일 수 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법과 제도는 우리의 기대보다 훨씬 더 무능할 때가 많다. 이미 수천개의 법률이 있고, 앞으로 수천개의 법률을 더 만든다고 해도 법의 무능함을 완전히 해결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법이란 고기잡이 그물 같아서 아무리 정교하게 만든다고 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반드시 생긴다. 구멍이 없다면 그것은 더이상 그물이 아니기도 할 테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이 없는 법의 무능을 메꿀 수 있는 것은 마음이 아닐까 싶다. 모든 일이 법과 제도를 잘 만드는 것만큼이나 누가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해내느냐가 중요하다.”

    205p. “여성들에게 폭력의 위험은 막연한 공포가 아니라 현존하는 실질적 위험임을 알기에 안전함은 내가 무언가를 선택하거나 포기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곤 했다. 그것은 단지 우중 산책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일상의 시간과 거리의 반경을 좁혔고, 세상을 향한 모험과 탐험을 가로막았다.”

    234p.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세계인권선언문 제1조의 이 문장이 인류의 약속이 되기 전까지 모든 인간은 똑같이 존엄하지 않았다. 존엄은 쟁취된 것이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마치 하늘에서 툭 하고 존엄함이 떨어져 인간의 뼛속에 박힌 것처럼, 우리가 우리를 존귀한 존재라고 믿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모두가 존귀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인류의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귀족만, 백인만, 남자만, 비장애인만, 이성애자만 들어갈 수 있던 존엄의 테두리를 계속 넓혀온 역사를 알고 있다. 그 역사의 페이지마다 형언할 수 없는 살육과 전쟁이, 배제와 차별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한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다른 사람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인권을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인권위 조사관님의 글을 읽는 내내 각종 사연들로 마음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 위안이 되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세상의 아픔을 끌어 안고, 쓰다듬으며 나아가고 있구나. 언제까지고 그들에게만 책임을 넘겨 뒷짐지고 있을 수는 없겠지만, 흉흉한 사건사고가 넘쳐나는 세상 속, 그래도 정말 말그대로 사회 모두의 ‘well-being’ 상태를 위하는 일꾼들이 있기에 내가 내 자리에서 내 일을 할 수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법과 제도의 무능함 속에서 그 그물망 사이 사이를 빠져나가는 이들을 함께 건져내고 싶다는 마음, 좁았던 존엄의 문을 조금 더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도록 테두리를 뜯어내는 일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 조사관님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통해 내 마음에 닿는 그 어떤 호소의 말들이 나의 삶을 통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기를.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은 후 게시하는 게시물입니다.
    #창비 #창작과비평 #어떤호소의말들 #최은숙 #책 #서평 #book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독서 #독후감 #220726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