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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독후감 ] [ 책추천 ] <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 , 김성경 >
    그믐🌚 독후감/그믐🌚 책 2023. 2. 17. 22:30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
    : 분단의 나라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9p. “북조선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은 남한사회의 역사적 중층성에 대한 무지로 이어진다. 그들이 사실은 우리의 거울상이라는 것, 그들의 고단한 삶의 경험과 의식에 남한 사람들도 깊게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점점 더 극단화되는 정치적 양극화나 분단으로 인한 사회의 군사화와 같은 남한사회의 문제가 북조선과 연동되어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남과 북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해야 자신을 온전히 반추할 수 있으며 분단으로 인한 사회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53p. “접경지역에서 북조선 여성을 돌보며 통일과 평화를 얘기하던 호기로운 모습도 찾기 어려워졌다. 나는 그것이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아팠다. 순영 할머니를 지탱해주던 삶의 의미 중 하나가 떨어져나간 듯했다. 아마도 나는 할머니와 북조선 여성들의 끈끈한 교류를 지켜보며 잠시 자매애를 꿈꿨던 것 같다. 모든 삶의 조건이 풍요로워 주변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더 약한 타자를 돌아보는 것의 숭고함 같은 것을 느꼈다. 가장 소외된 것에서 가장 불안정한 존재들이 서로 연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감동적인 것은 없었다.
    또한 나는 중국에서 결코 주눅들지 않았던 순영 할머니를 보면서 잠시 안도했던 것 같다. 삶의 고단함을 힘없이 증언하는 피해자의 모습이 아니라 자존감이 높아 뭐든 해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여성들이 만들어가는 희망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었다. 아무리 고단한 상황이나 혹독한 운명 앞에서도 나름의 행위주체성을 발휘하려는 여성들의 힘을 직접 목격하였다. 국가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 북조선 여성들이 그나마 삶을 지속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 스스로 좌절하지 않고 뭐든 해보려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210p. “사실 나는 중국이나 한국으로 이주한 북조선 여성들을 만나면서 그녀들의 삶에 식민과 전쟁, 그리고 분단이 중첩되어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곤 했다. 하지만 정작 내 삶 주위에서는 그러한 전쟁과 분단의 흔적을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에게 분단 문제는 어쩌면 현지조사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내 삶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즉, 분단 문제를 ‘직업’으로 접근했지만 그것이 나와 관련되어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였다. 이는 나의 가족이 이산가족이나 실향민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상에서 마주하는 북조선 출신자와 친구나 동료는 될 수 있었지만 그들이 내 삶의 일부라고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215p. “나의 의도된 ‘무관심’은 나로 하여금 어머니의 완고함 이면에 있는 고통을 전혀 가늠하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의 삶 자체가 사실은 분단과 깊숙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나는 몰랐다. 친정 아버지가 어디에 있든 제발 조용히 지내기를 매일 밤 기도했다는 어머니의 고백에는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릴지 모른다는 불안과 고통이 가득했다. 당장 친정아버지의 생사를 걱정하는 것도 어린 어머니에게는 힘겨운 일이었을 텐데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어머니는 더욱 ‘반공’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으리라. 월북했을 수도 있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지워내기 위해서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했을 것이다. 아버지를 앗아간 북조선이라는 곳을 끔찍하게 싫어하게 된 것도, 북조선과 연루되는 그 어떤 것도 부정적으로 감각하게 된 것도 어머니의 삶의 맥락에서는 충분히 이해될 만했다. 그런 어머니 앞에 북조선을 연구한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며느리가 나타났으니 어머니가 얼마나 당황하셨을까 싶기도 하다.”

    226p. “즉,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이유에서 자동적으로 페미니스트 인식의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권력의 물질성과 사회적 관계성을 꿰뚫어 볼 때 바로 페미니스트 입장이라는 위치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 만큼 페미니스트 입장이라는 것은 연구자의 인식론적 투쟁과 정치적 각성을 통해서 접근 가능한 것이 된다. 이 논의를 조금 더 확장해본다면 연구자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이나 구조적 제약은 분명 존재하지만, 연구자라면 현상 이면에서 작동하는 권력과 사회적 관계를 문제시하는 인식론적 입장과 시각을 구축해내야만 하는 것이다.”

    233p. “세상을 해석하는 언어의 부재를 절감하면서 나의 위치에서 경험하고 포착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무엇이 있을지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비로소 나의 의식 속의 식민성을 마주하게 된 상황에서 새로운 탈식민적 언어와 의식을 갑자기 구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탈식민주의 이론이 혼종성hybridity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설파하듯이 보편성이라는 맥락에서 이미 사고체계를 장악한 식민자의 언어 밖의 또다른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식민주의적 시선이 일상과 의식, 언어에 얼마나 깊숙이 배어 있는지 분석하고, 그 틀 안에서 의미의 전유appropriation와 혼종적 실천 같은 저항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내 안의 의존과 열등 콤플렉스를 마주함으로써 그 틈새의 다양한 경험을 포착하고 이에 천착한 사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238p. “나는 북조선 여성들을 만나면서 비로소 한반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남한이라는 시공간에 내재되어 있는 식민과 분단으로부터 내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확인하였다. 그녀들만의 경험은 없었다. 그녀들의 노동, 사랑, 결혼, 출산, 양육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삶을 반추했다. 때로 나는 자매애와 연대감을 느끼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녀들의 강한 의지에 압도되기도 했다. 나의 기준으로 그녀들의 삶을 재단하면서 안타까워했으며, 반대로 또다른 몇몇 북조선 여성들은 오히려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는 나를 안쓰러워하기도 했다. 그녀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나의 삶의 딜레마가 무엇인지도 발견했다. 이러한 경험이야말로 천광싱이 언급했던 ‘타자 되기’의 윤리학인데, 바로 하위주체인 그녀들의 입장에 서봄으로써 새로운 삶의 방식과 가능성을 상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북조선 여성, 자이니찌 여성, 조선족 여성 등 식민과 분단 구조에서 가장 힘겨운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각자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녀들의 위치가 그녀들을 제약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들의 눈물겨운 행위주체성은 전복성과 해방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동안 열등감에 휩싸여 중심만을 지향하며 살아온 내가 그들을 만남으로써 조금씩 변화했다.”

    요새 내가 경계하는 것은 일반화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나의 무지와 그에 따른 자아의 비대로 인한 타인들의 대상화인데, 이는 특히 내가 일을 하면서 대상자의 사례관리를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알아볼 때 자주 나의 편견을 깨닫게 되곤 한다.
    사실 ‘탈북민’, ‘자이니찌’ 라는 단어 속에서 오는 선입견이 내게 아직도 남아있는 편인데 작가님이 전체적으로 뭉뚱그려서 설명하는게 아니고,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살려 그리듯이 풀어내셨기 때문에 대상자를 막연하게 느껴지기만 했던 유리벽을 보다 편하게 해체시켜주었다.
    전쟁, 냉전, 분단체제의 파고 속에서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또 하나의 2등시민임에도 생존을 위해 늘 그렇듯 악착같이(악착같이라는 표현이 주로 여성에게만 붙는 점도 경계해야겠지만) 그러모아 살아남는다. 그러나 역시 일반화할 수 없는 것은, 그 가운데에서도 소외된 사람간의 연대와 우정이 존재하고 때로는 비정하게도 자기 자식과 가족을 버리면서도 생존을 선택해 나가기 때문이다.
    책의 뒷면에는 ‘떠나온 여자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각자의 세계를 만들어간다’고 나와있다.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생존을 위해 떠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미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후회없이 살아남는 길을 걸어가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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