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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 [책추천] <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 , 장폴 뒤부아 >
    그믐🌚 독후감/그믐🌚 책 2020. 9. 29. 16:04

    창작과 비평. '창비' 사전서평단에 다시 한 번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ㅎㅎ

    이번에 읽은 책은 '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 ' 입니다.

    제 인스타그램을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자주 올리던 고민글의 주제와 많이 닮아있는 제목이죠?

    처음 딱 제목을 보자마자 끌렸다는 걸 부인할 수 없네요 ㅎㅎ

    그럼 책 내용은 어땠는지, 독후감을 달려보겠습니다.





    책에 유독 포스트잇이 많이 달렸습니다.

    등장인물이 다양하기도 하고, 이름이 익숙치 않은 외국어라 헷갈리지 않기 위해 인물의 개성적인 부분 또는 사건마다 붙여놓았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의 이름은 폴이다.(작가님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작가님의 이름과도 닮았다.)

     

    사실 처음 부분만 읽으면 당황스럽기 그지 없다. 죽은 가족들이 눈에 보이는 주인공이라니. 그리고 작가는 불친절하게도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를 시간 순서대로 제시하지 않아, 갑자기 주어지는 주인공의 상황에 독자들은 따라가기 바쁘다.

    시작은 폴이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상황에서부터 전개된다. 폴이 왜 구치소에 있는지를 풀기 위해 폴의 어린 시절 가정환경이 어땠는지가 제시되는데, 모든 배치와 순서마다 작가님의 의도가 담겨 있는 느낌을 받았다.

    폴의 아버지는 목사님이며, 어머니는 영화를 상영하는 상영관의 대표로 보인다.

    작가가 신앙에 대해서 확고한 철학이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대목이 많았는데, 교회의 신앙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기독교인으로서 그게 불편했다기보다는, 작가가 책의 제목과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게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는 각자의 다른 세상을 인정하기보다는 하나님이라는 확고한 진리를 믿는 종교기 때문에,

    폴의 아버지의 신앙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26p. 아버지는 모래에 묻힌 교회당, 신앙의 잔해를 보고 목사가 되겠다는 뜻을 품었다. “그게 말이다, 내가 신앙이 없었을 때는 신앙이 무슨 뜻인지조차 몰랐지. 그 독특하고 기막힌 구경거리 앞에서 내가 느낀 건 순수한 미학적 감응이었어. 그런 감흥은 일생에 한번밖에 없는 거란다. 마치 스카켄 화파의 한폭 그림 같은 정경이었지. 만약 그날 그 장소에서 합각지붕 시계탑만 빼고 죄다 모래에 묻혀버린 기차역을 봤다면 나는 목사가 아니라 역무원이 됐을 거야.”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육지생활자였지만 끝없는 의심 속에서 항해를 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던 사람, 때로는 버려진 교회의 부실한 돛에 마음이 끌리고 때로는 철의 강건하고 모험 넘치는 삶에 매혹되었던 사람.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비크리스천에 사회주의 사상을 옹호하였으나 분명히 한가지 닮은 점은 각자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에 대해 굳센 믿음을 가졌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꺾여줄 의지가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그 둘의 관계는 마지막을 향해 달려간다.

     

    47p. 그날밤 있었던 일은 전부 기억한다. 각자 상대의 신념을 무너뜨리기 위해 구사한 말, 그러한 목적으로 구사한 목소리의 음량, 그뿐 아니라 숨 막힐 듯 축축했던 공기, 강에서 올라오던 흙내, 아버지가 뛰쳐나가 현관문을 세게 닫았을 때의 그 매서운 소리도 기억한다. 그날, 스카켄 출신의 남자는 한밤중에 집을 나갔다. 어딘가로 가서 분노의 모래 속에 잠기기 위해.

     

    76p. 아나는 흥행 수입을 염두에 두었고, 상영 프로그램을 미리 생각해두었으며, 세상이 어떤 식으로 다가오든 거리낌없이 받아들이고 누렸다. 요하네스는 제자리를 지키려 애썼고, 조용히 신의 말씀에 대해 글을 썼고, 환상을 깨치지 않기 위해 자기 손에 쥔 것으로 대충 급조하여 소소한 마술을 부렸다. 그러나 여전히 모자는 없었고 토끼는 언감생심이었다.

     

    부모님의 가정해체를 지켜봤음에도 폴은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폴 자신과 닮은 점을 찾기 어려운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폴의 부모님과 폴, 위노나 모두 기본적으로 나라와 문화가 서로 다른 커플이다.

    위노나는 아주 직선적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직선적이라고 보는 것도 어쩌면 우리 문화에서나 가능한 표현일 것이다. 위노나는 키체시피리니족의 인디언 문화에서 자라왔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문화에서 자란 둘은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혼인제도라고 생각한다.

     

    202p. “결혼을 했어요, ?” 그렇다, 나는 결혼을 했다. 사실 우리의 결합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른 문제이긴 했다. 행정적으로 영국의 여왕 폐하와 그에 상응하는 프랑스 당국은 우리를 단순한 내연관계로 규정할 것이다. 이 라틴어 명사를 번역하자면, ‘침대를 같이 쓰는 사람들정도일 텐데, 이 말 자체는 부끄러울 것이 없고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키체시피리니족의 위대한 알곤킨 추장 테수아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비록 그는 1636년에 죽었지만, 그 위대한 인디언 현자가 위노나와 나를 아내와 남편으로 선언했으리라는 데 추호의 의심도 없다. 같이 살기 시작한 지 좀 돼서 내가 결혼을 하고 싶은지 물었을 때 나의 내연녀는 바로 그렇게 설명했다. “하지만 우린 이미 결혼했는걸. 알곤킨 인디언들은 계약이나 신성한 맹세 같은 거 없어. 함께 살고 서로를 위해 살면 다야. 같이 살다가 아니다 싶으면 헤어지고.” , 이 경제적인 네문장이 영국 여왕과 보통법을 그 습기 자욱한 섬나라로 반송해버렸다.

     

    각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님을 작가는 여러 장면에 걸쳐 설명한다. 폴의 부모님의 이혼, 그리고 같은 대상이라도 문화권마다 해석이 달라지는 것들 말이다.

     

    221p. 벌새는 위노나가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열쇠고리였다. 그녀는 그 새 모양 쇠붙이를 언제나 비버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일종의 수호천사처럼 생각했다. 아내는 남아메리카 전설에서 오만가지 모순적인 소식들의 전령으로 등장하는 그 새를 못 말리게 좋아했다. 가령 타이노족에게 벌새는 행복과 번영의 매개지만, 브라질에서는 이 새가 집 안으로 날아 들어오면 사망 전보를 받은 것처럼 불길해한다.

     

    그러나 작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음에도 함께 소통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지만 서로를 향한 사랑이 있다면 마침내는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의 의견을 누크(강아지)와 폴의 사랑스러운 에피소드를 통해 풀어낸다.

     

    214p. 나는 내 집에서 속을 풀어놓았고, 누크는 내 얘기를 듣고 나름대로 내 말을 알아들었다. 아마도 고 녀석은 인간의 횡설수설을 해독하느라 딴에는 애를 썼을 것이고, 나 역시 녀석의 짖는 소리와 몸의 언어를 해독하느라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모든 일이 그렇듯 배우는 기간이 지나자 꽤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우리는 이제 같은 언어를 쓰고 있었으므로 일상의 기본적인 일들을 잘 처리할 수 있었다. 누크는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듯 읽었고 나는 누크에게 늘 주의를 기울였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면 저절로 그렇게 되듯, 고 녀석을 향한 나의 애정 어린 몸짓은 늘어만 갔다.

    253p. 나는 말이 필요 없으나 세심한 주의가 있는 그 세상이 좋았다. 우리가 아직 말을 할 줄 모르던 시절에 인간의 지성을 구원했던 관찰력이라든가 순발력, 지성이 태고의 흔적을 되찾은 세상이었다.

     

     

    폴은 감옥 생활을 마치고 일상 생활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는 자기와 함께 하는 가족들을 위로하듯, 도박장을 방문하여 아버지를 도닥이며 친척들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죽은 가족의 영혼이 보이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생각을 계속 해보았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알겠다. 분명히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아간다. 각자가 처해진 환경이 다르고, 타고난 성정이 다르며, 나와 상호작용하는 주변 인물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너와 나의 세계가 절대 만날 수 없는 평행 세계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만나고 이야기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그 정도가 아주 미미하더라도 마치 나비효과처럼 누군가에겐 태풍같은 충격을 일으킬 수도 있다.

    처음 폴이 갇혀 있던 감옥이 바로 폴이 스스로를 가둔 폴만의 세계는 아니었을까?

    폴은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다가, 자신이 사랑했던 가족들(아버지, 위노나, 누크)의 영향을 받아 감옥을 나와 새 삶을 살아간다.

    내가 개인적으로 이 책을 폴의 성장스토리로 해석하게 되는 이유는 책의 마지막즈음에 나오는 다음 문단들 때문이다.

     

    292p. 나는 괜찮았다. 나는 나의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심장이 뛰고 그들이 숨 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곁에 있어 평안했다. 그들 모두, 셋 다 자기 방식대로 내 삶을 보호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들이 알기를 바랐다.

     

    293p. 바닷가를 따라 나 있는 거리를 걷는다. 여기를 동쪽 해안길이라고 부른다. 저 멀리 한센가의 커다란 붉은 지붕 건물이 보인다. 발트해를 마주 보는 집이다. 바람에 나무가 휘고 건물 발치에 모래가 쌓인다. 새로운 나라의 바닷바람을 들이마신다. 이게 내가 가진 전부다. 잠시 후 이 기나긴 길의 끝에서, 나는 친척들에게 가서 인사를 하리라. 현관문을 두들기면 누군가가 나에게 문을 열어주리라. 그러면 나는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말하리라. “저는 요하네스 한센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세상에 살기 때문에 폴 역시 폴의 세상에서 살았다. 그러나 폴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또는 폴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의 세상들이 맞물리며, 폴의 세상은 그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변화한다. 그 사람들이 폴에게, 폴의 세상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가 곧 폴이 보는 영혼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폴은 그 영혼들, 자신의 세상에 진심으로 부딪혀온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끝내는 신앙과 도박 등으로 어쩌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왔던 아버지를 받아들이며, 자신이 곧 아버지의 아들임을 체화한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면서 적어도 같이 발맞춰 걸어갈 동반자들이 함께라면 더 이상 외롭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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