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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 [책추천]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핍 윌리엄스 >
    그믐🌚 독후감/그믐🌚 책 2021. 9. 5. 16:39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핍 일리엄스 장편소설 /서제인 옮김

    25p.
    “그럼 그 비밀을 어떡할 거예요?” 리지가 물었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 단어를 리지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나는 아빠에게 그 단어를 안전하게 보관해달라고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내 주머니에 언제까지고 간직하고 있을수도 없었다.

    “이것 좀 맡아줄래?” 내가 물었다.

    “그래요, 아가씨가 그랬으면 한다면요, 뭐 그리 특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내게 왔기 때문에 특별했다. 거의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아주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었다. 작고 연약했고, 중요한 뜻은 담겨 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벽난로 불길에 던져지지 않도록 지켜야 했다.

    117p.
    “그냥 단어들이에요, 리지.”

    “아가씨한테 ‘그냥 단어들’같은 건 없잖아요, 에시메이. 특히 트렁크에 들어가는 경우에는요. 단어들이 뭐라 그러나요?”

    “내가 혼자가 아니었대요.”

    <옮긴이의 말>

    564p.
    우리가 언어를 정의하는 방식이 우리를 정의할 수도 있다. 이 소설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나의 노력이다. 쓰는 내내 우리가 단어들을 이해하는 방식에 질문을 던질 만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감정들을 전하려 애썼다. 에즈미를 단어들 한가운데 집어넣음으로써, 나는 단어들이 그에게, 또한 그가 단어들에 미쳤을 영향을 상상할 수 있었다.

    576p.
    역사 속에서 여성의 존재와 업적이 누락되고, 삭제되고, 망각되기를 반복한다는 것이 근거 없는 뜬소문이 아니라 엄연한 실체를 지닌 현실임을 아는 이에게 이 소설의 울림은 각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재건하고 복원하는 일에는, 파괴하는 손에는 깃들어 있지도 않고 깃들 수도 없는 엄청난 양의 상상력과 애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탁월하고 권위 있는 사전으로 평가받는 「옥스포드 영어사전」의 제작 과정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단어를 정의해 수록하겠다’는 원대하면서도 무모한 목표가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어떤 단어가 사전에 등재될지 결정하는 일은 모두 남성들의 몫이었으며, 오직 문헌에 기록된 단어들만 수록한다는 원칙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수많은 단어가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끝없이 쌓인 책들을 뒤져가며 인용문을 찾아 단어들의 용례를 기록으로 남기고, 그것을 편집하고 인쇄해 사전으로 만드는 전 과정에 헌신적으로 참여했던 여성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자신들의 기쁨과 고통을 거의 설명해주지 않는 언어를 평생 다듬는 일을 하며 그들은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을까? 세계를 정의하는 일을 남성들의 손에만 맡겨두는 대신 여성들이 직접 할 수 있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실제로 「옥스퍼드 영어 사전」 제작 과정에서 분실되었으나 어떤 경로로 분실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단어 ‘여자 노예Bondmaid’가 작가에게 불러일으킨 것이 이런 질문들이라면, 단어에 관해서라면 탐욕스럽다 할 만큼 호기심과 집요함을 보여주는 주인공 에즈미 니콜, 그와 관계 맺는 다양한 여성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제작하는 사전 「여성들의 단어와 그 의미」는 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든 생각은 “미친거 아니야?!!?” 였다.
    처음엔 책의 두께를 보고 ‘옭… 스마트도서관에서 책 이미지만 보고 그냥 끌리는대로 빌린건데, 가볍게 읽으려고 빌렸던 터라 두께를 알았으면 아마 안골랐겠지.’ 하며 일단 가방에 쑤셔넣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간 사랑스럽다는 단어를 입 밖에 꺼내어본지 꽤 오래됐다.
    하지만 오늘 정말 오랜만에 내 머릿속 서랍에서 이 단어를 꺼내본다.
    이 책의 캐릭터 하나하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세상과 언어를 사랑하는 에즈미야말로 너무 사랑스럽고, 그 삶의 생기에 힘입어 나 역시 세상에 대한 사랑을 다시 회복할 용기가 났다.
    원문이 이랬던건지, 번역이 초월하게 잘된건지 누구의 덕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조연의 모든 캐릭터들이 사랑스럽고 그들이 가지는 고뇌와 생각들이 너무 와닿아서 안타까웠다.

    요새 어떤 미디어들은 주인공을 슬픔과 고통 속에만 가둬두어 주인공에게 지나치게 가학적인 서사를 부여하곤 한다. 요새 그런 우울한 스타일이 유행하나? 싶긴 한데, 에즈미의 삶도 마냥 행복하진 않고, 슬픈 일들이 연속해서 나타나 그를 넘어뜨렸음에도 기억나는건 그 ‘부드러운 연대와 단단한 자아’였다는 점도 이 책을 더 사랑하게 된 계기가 됐다.

    처음에는 단순히 아, 우리에게도 언어가 필요하다의 외국 버전의 소설책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본 언어에 담긴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풀어내는 책정도라고 여겼는데, 서프러제트부터 계급에 대한 시선까지 방대한 내용을 담은 소설책이었구나를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느꼈다.
    방대한 영국의 역사의 일부였음에도, 잊혀진 여성들의 역사와 픽션들이 거기 있었다.

    심리학은 나 스스로와 세상에 대한 이해를 도왔으나, 그게 치료하는 방향으로까지 내 마음을 이끌어주진 않았다. 원래 호기심이 많아서 왜 그런건지는 궁금해했으나, 그 다음 방법인 낫게 하는 것까지는 관심이 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즈미의 삶과 그 마지막을 보면서 (물론 픽션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다른 사람을 돕고, 무너진 사람이 그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 걸음 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에 ‘쓰이면 좋겠다’ 라는 정도의 마음이 아닌 ‘쓰여야겠다’는 마음의 결심을 하게 됐다.
    한 학기는 다시 시작됐고, OT니까 교수님은 짧게 끝낸다고 했으면서 어제 겨우 20분 빨리 끝내주셨다. 다시 학교를 가서 좋았던 점 중 하나는 1년에 2번 새로운 출발을 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3월과 9월. 이번 학기에는 내가 배운 학문으로 어디까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는 새로운 목표로 힘차게 시작해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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