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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 [책추천] < 어린이라는 세계 , 김소영 >
    그믐🌚 독후감/그믐🌚 책 2021. 11. 9. 16:39

    서점에서 직접 구매한 책!

    어린이에 관련된 일을 하고 어린이를 위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 트위터에서 해당 내용의 일부 발췌문을 보게 되었다.

    지금 찾아보려니 찾아볼 수 없어, 어떤 부분이었는지는 기억 안나지만 아마 사람은 똑같으니까 같은 부분에 내가 밑줄을 긋지 않았을까 싶다.

     

    들어가며

    6-7p. "그건 나 스스로 어린이에 대해 말할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양육자도 아니고, 교육 이론이나 어린이 심리를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 내가 어린이에 대해서 말하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될까 봐 늘 조심스러웠다. 양육 환경이나 교육 현실을 몰라서 딴 소리를 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간 "네가 애가 없어서 그래" 같은 말을 많이 들어 온 탓도 있었다.
     한 편으로 나는 그런 말의 그늘에 피해 있었다. 나는 '어린이 전문가'가 아니니까 슬쩍 빠져 있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어린이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와 더 고민할 문제들을 어린이를 직접 기르고 가르치는 분들의 몫으로만 떠넘긴 셈이다. 어린이는 누군가의 자녀이고 학생이지만 각자가 우리 세계의 어엿한 구성원이기도 하다는 걸 잘 알면서. 어린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회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어린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

    착한 어린이

    32-37p. "어린이에게 '착하다'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세상이 거칠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착하다는 말이 약하다는 말처럼 들릴 때가 많아서이기도 하다. 더 큰 이유는 어린이들이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 두려워서이다. 착하다는 게 대체 뭘까? 사전에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고 설명되어 있찌만, 실제로도 그런 뜻으로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어른들의 말과 뜻을 거스르지 않는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니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하는 건 너무 위계적인 표현 아닌가. 
    나와 달리 어린이들은 '착하다'라는 말을 서스럼없이 쓴다. 주로 친구를 설명할 때 그런다. 그럴 때 나는 꼭 "그 친구의 어떤 점을 보면 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하고 물어본다. 대답은 대체로 이렇다. "누가 뭘 빌려 달라고 하면 잘 빌려줘요.""다른 애드링랑 안 싸워요.""하기 싫은 일도 잘 해요." 이따금 "얌전해요"라고 답하는 어린이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스스로를 착하다고 하는 어린이는 드물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 역시 친구한테 준비물을 잘 빌려주고,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고, 종종 솔선수범하면서도 그렇다. 겸손해서 일까? 그보다는 '착하다'는 말의 힘이 너무 강력해서 차마 손을 대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은 남에게 들어야 의미있다는 것을 어린이도 알기 때문이다. '착한 어린이'라는 말에는 '남의 평가'가 들어가게 마련이다. 이때 '남'은 주로 어른들이다. 부모님, 선생님, 산타 할아버지 같은.
    '착하다'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어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어린이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어린이를 상대로 한 범죄는 어린이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 시작될 때가 많다.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는 걸 도와 달라거나 짐 옮기는 걸 도와달라는 식으로, 어린이의 착한 마음을 이용해서 어린이를 유인하는 범죄 이야기를 들으면 머리에 불이 붙는 것 같다. 슬프고 두려운 일이지만, 가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착한 어린이가 되려고 애쓰다 멍드는 어린이가 어딘가에 늘 있다.
    그렇다고 어린이에게 착한 마음을 버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윤이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그럴 때 나눠 주면 안 되는 거야!" 할 수는 없다. 친구를 돕는 어린이에게 "너 진짜로 이거 원해서 하는거야? 진짜로, 진짜로 진심이야?" 하고 캐물을 수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어린이의 착한 마음이 걱정스러웠다. 예지와 수업하기 전까지는.
    예지와 ⌜사람 백과사전⌟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미리 내준 숙제는 '이 책의 그림을 모두 읽어 오는 것'이었다. ⌜사람 백과사전⌟은 사람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몸의 변화와 그것의 영향, 또는 영향 없음을 알려 주는 지식 그림책이다. 장애가 있는 어린이가 보조 기구를 이용하여 운동경기를 즐기는 그림처럼, 다양한 체형과 신체 상태를 그림으로 보여 주는 점이 좋다. 그래서 예지에게 모든 그림을 꼼꼼하게 손으로 짚어 가며 읽어 오라고 했는데, 예지가 숙제를 잘해 왔다.
    "이 책에 있는 사람들이요, 되게 다양하더라고요. 모습이요."
    "그래, 맞았어. 작가가 왜 그런 그림을 그렸을지 생각해보자. 그러니까 이런 그림을 그려서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었을까? 그런 걸 주제라고 하는거야. 주제를 찾아보자."
    "음...... 서로 몸이 달라도 무시하지 말자?"
    "그것도 좋은 말이야. 그런데 보통은 '무엇을 하지 말자'보다 '무엇을 하자'고 하는 게 남을 설득할 때 더 좋은 말이야. 예지가 관심 있는 환경 운동으로 생각해 보면, '종이컵을 쓰지 말자'보다 '개인 컵을 가지고 다니자'가 더 효과적인 것처럼."
    그러면서 칠판에 "서로 몸이 달라도                하자"라고 썼다. 내심 '존중하자'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예지의 답을 기다렸는데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예지야, 그럴 때 '무시'의 반대말을 떠올려 보면 좋아."
    "아! 알았다!"
    유일한 답이라는 듯, 예지는 이렇게 썼다.
    "서로 몸이 달라도 같이 놀자."
    그 순간 나는 예지에게 백오십 번째로 반했기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존중'이라는 단어를 가르치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기회를 줬다. 예지는 이번에는 이렇게 썼다.
    "서로 몸이 달라도 반겨 주자."
    백오십 한 번째 반한 상태로 나는 두 문장 옆에 각각 하트를 그리고, 조그맣게 '존중하자'라는 말도 적었다. 이날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정리하는데, 차마 칠판을 지울 수가 없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나눠 줘요!"는 '곱고 바른 말'이고, "같이 놀자""반겨 주자"는 '상냥한 마음씨'다. 사전 뜻 그대로다. 어린이는 착하다. 착한 마음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어른인 내가 할 일은 '착한 어린이'가 마음 놓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나쁜 어른을 응징하는 착한 어른이 되겠다. 머리에 불이 붙고 속이 시커메질지라도 포기하지 않겠다. 이상한 일이다. 책은 내가 어린이보다 많이 읽었을 텐데, 어떻게 된 게 매번 어린이에게 배운다."

    어린이의 품위

    41p. "어딘가 좀 할머니 같은 말이지만, 나는 어린이들이 좋은 대접을 받아 봐야 계속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안하무인으로 굴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어린이가 이런 데 익숙해진다면 점잖음과 정중함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점잖게 행동하고, 남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사실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은 그것이다."
    44p. "서점에는 한 가족이 들어와 흩어졌다 모였다 하면서 책을 고르고 있었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이가 아빠와 실랑이 끝에 색칠공부로 추정되는 어떤 책을 들고 계산대에 섰다. 그런데 아빠가 "이제 계산하게 아빠 줘"하는데도 어린이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아빠가 다시 "사 줄게. 아빠를 줘야 계산을 하지"하는 걸로 봐서는 혹시 아빠가 마음이 변해 안 사줄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때 나는 오래 잊기 어려운 장면을 보았다. 앞치마를 두르고 계산대에 계시던 나이 지긋한 사장님이 어린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따로 계산해 드릴까요?"
    어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은 어린이에게 책을 받아 아빠와 계산을 마친 다음 다시 어린이에게 "따로 담아드릴까요?" 하고 물으셨다. 어린이 손님은 그렇게 해 달라고 했다.
    "아유, 귀여워 몇 살이야? 아빠 드려야지." 사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돈을 내는 것은 아빠니까 아빠 편을 드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 어쩌면 어린이도 자기를 어르는 말에 넘어갔을지도 모르고, 아마 그런 경우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서점의 정중한 손님 대접이 어린이에게 얼마나 기억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이라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그렇게 하는 사장님의 모습에도 품위가 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서점에서 받은 좋은 인상이 더 확실해졌고, 입구의 어린이조차 친근하게 느껴졌다."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91p. "어린이를 만드는 건 어린이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는 즐거운 추억과 성취뿐 아니라 상처와 흉터도 들어간다.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어린이의 것이다. 남과 다른 점뿐 아니라 남과 비슷한 점도, 심지어 남과 똑같은 점도 어린이 고유의 것이다. 개성을 '고유성'으로 바꾸어 생각하면서 나는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 순간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간다고 할 때, '다양하다'는 사실상 '무한하다'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102p. "어떤 어린이는 여전히 TV로 세상을 배운다. 주로 외로운 어린이들이 그럴 것이다. 어린이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모습을, 함께 노는 즐거움을, 다양한 가족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가족이 아니어도 튼튼한 관계를, 강아지와 고양이를, 세상의 호의를 보여 주면 좋겠다. 세상이 멋진 집이라고 어린이를 안심시키면 좋겠다. 
    나도 TV가 환상을 판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화려한 것을 보여 줘야 한다면 차라리 세계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면 좋겠다."

    어린이가 '있다'

    219p. "사회가, 국가가 부당한 말을 할 때 우리는 반대말을 찾으면 안 된다. 옳은 말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사회에 할 수 있는 말, 해야 하는 말은 여서을 도구로 보지 말라는 것이고,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세상을 만들라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성별이나 자녀가 있고 없고가 기준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어린이를 위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린이 스스로 그렇게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약자에게 안전한 세상은 결국 모두에게 안전한 세상이다. 우리 중 누가 언제 약자가 될지 모른다.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한다. 나는 그것이 결국 개인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는다."

    길잡이

    253-256p. "나는 예전에 '어린이는 어른의 길잡이'라는 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어린이를 대상화하다 못해 신성시하는 듯해서였다. 어른이 어린이를 잘 가르치고 이끌 생각을 해야지, 어린이한테 길 안내의 책임을 떠맡기다니. 그리고 어린이가 길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무슨 신비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린이에게 할 말을 고르고, 그 말에 나를 비추어 보면서 '길잡이'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 어린이가 가르쳐 주어서 길을 아는 게 아니라 어린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고심하면서 우리가 갈 길이 정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를 가르치고 키우는 일, 즉 교육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 된다. 가정과 학교는 교육의 출발점일 뿐 결국 책임은 사회가 져야 한다. 그러기 싫어도 사회의 몫으로 돌아오고 만다.
    어린이, 청소년을 포함한 '어린 세대'의 그릇된 면이 드러날 때면 곳곳에서 '교육의 실패', '시민 양성의 실패' 같은 탄식을 보게 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나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혹시 나는 이 말에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을 담았던 게 아닐까? 마치 사회 구성원으로서 나는 잘못한 게 없고, 신입을 잘 훈련시키지 못한 가정과 학교를 점검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듯이. 하지만 어린이는 사회 바깥에서 다 자란 다음 사회에 배치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도 안되고, 그럴수도 없다. 어린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회 속에서 자란다. 가정에서 보는 것,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기초로 삼아서 세상을 보고 세상에서 배운다.
    사회의 문제는 학교, 가정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온라인 개학 이후 학교가 단지 건물과 교과 과정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학교 자체도 다양한 직군의 노동자와 학생들이, 학생과 학생이 관계 맺는 사회다. 가정도 사회와 분리될 수 없다. 사회의 돌봄 없이 어린이를 가정에만 내맡길 때 어떤 참혹한 학대가 일어날 수 있는지 뼈아프게 확인하고 있다. 교육을 이야기하려면 사회를 보아야 한다. 성범죄자들이 처벌받지 않고, 감염병 사태 중에 도서관보다 성매매 업소가 먼저 문을 열고, 예능 프로그램에서 어린이와 여성을 함부로 대하고, 소수자를 혐오하는 이들에게 마이크가 주어지는 세상에서 학교와 가정이 청정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나는 교육의 실패를 선언하고 싶다면 세상의 실패를 선언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냉소주의자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절망적인 소식들이 쏟아질 때면 자연히 포기하는 쪽으로 몸과 마음이 기운다. 분노와 무력감 사이를 오가다 보면 이 나라를 외면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내가 버리는 짐을 결국 어린이가 떠안을 것이다. 나는 조그마한 좋은 것이라도 꼼꼼하게 챙겨서 어린이에게 주고 싶다. 거기까지가 내 일이다. 그러면 어린이가 자라면서 모양이 잘못 잡힌 부분을 고칠 것이다. 
    내가 이렇게 큰소리치는 것도 다 어린이 때문이다. 어린이가 그림을 망쳤을 때 "다 소용없는 일이란다. 구겨 버리렴"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고칠 수 있는지 보고, 안 되면 새 종이를 주고, 다음에는 더 잘 그리도록 격려할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이 말해야 한다. 실제로 어린이라면 어떻게 할까? 내가 새 종이를 주며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늘여 놓기도 전에 어린이는 종이를 뒤집어 뒷면에 새로운 그림을 시작한다. 냉소주의는 감히 얼씬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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