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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책추천] <십대를 위한 동화 속 젠더 이야기, 정수임>
    그믐🌚 독후감/그믐🌚 책 2020. 2. 29. 02:30

    진행하는 책 모임에서 이번에 고른 책은 바로 '십대를 위한 동화 속 젠더 이야기'이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컨텐츠에 어른들의 무지로 인한 다분히 폭력적인 부분이 스며들어 있다는 부분을 깨닫고 함께 읽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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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대를 위한 동화 속 젠더 이야기

    42p. 누군가 모르는 척 하지 않을 때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 정도는 뭐., ‘원래 그래.’ 같은 생각도 점점 사라지겠지.

    모르는 척 하긴 쉽다. 아는 대로 행동하기는 참 어렵다. 근데 우리가 쉽고 어려움을 핑계로 무언가를 미루기엔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56p. <대상화>

    아름답다는 것이 뭐냐고? 글쎄, 그 아름답다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른 게 아닐까 싶어. 어떤 사람은 겉모습에서 또 어떤 사람은 내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지. 또 같은 겉모습이나 내면이라도 사람들마다 평가를 다르게 할 수 있지. 그러니까 아름답다는 건 고정된 어떤 형태라고 말하기가 참 어려운 것이야. 다만 너와 네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게 다를 수 있고, 혹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만 얘기해줄 수 있겠다. 하지만 대상화는 나의 기준보다는 남의 기준이 중요해. “내가 이러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어요?” 와 같은 말에 담긴 태도지. 그러다 보니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해.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야 하니까 말이야. 그럼 이런 질문도 가능하겠다.

    “언니, 그럼 살도 빼지 말고 머리도 기르지 말고, 화장도 안하면 대상화에서 자유로운거야?

    아니, 그렇지 않아. 이 역시도 대상화되지 않으려고 자신의 욕구를 숨기거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거니까 말이야. 그럼 어쩌라는거냐고?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하고 싶은 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건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야. 그렇기 때문에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란다. 끊임없이 자신의 만족과 기준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답을 구해야만 해.

    탈코르셋과 대상화에서의 자유는 분명히 다르다. 탈코르셋과 대상화에서의 자유가 공유하는 부분도 있으나 차이점을 명확히 아는 것이 곧 질문의 답변이 될 것이다. 탈코르셋이 지향하는 바는 편함이 아니다. 탈코르셋을 편하기 위해 한다고 가정하는 경우, 그럼 원피스도, 긴머리도 흔히 불리는 ‘코르셋’ 역시 편하다는 핑계로 벗어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상화에서의 자유는 편함과 등식이 성립될까? 이 또한 아니다. 과연 나의 ‘나다움’은 사회와 문화에서 100% 자유한 온전한 ‘나다움’일 수 있을까에 대한 근본적 의문은 제쳐두더라도, 각자의 가치에 따라 ‘나다움’에 편하지 않은 것이 포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탈코르셋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외·내적 굴레의 틀을 깨부수는 운동이다. 당장 내가 조금 불편하고, 나답지 않은 것 같더라도 거시적으로 사회현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개인차원에서의 노력. 나는 탈코르셋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 

    65p. 청소와 돌봄이 필요한 시기에 소녀들을 데리고 간다는 것은 여자는 모두 엄마 노릇을 해야 한다고 믿는 거고, 또 소녀들 역시 엄마 노릇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니 따라간 것 같거든.

    너무 무서운 말이다.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어른여성의 롤모델이 가정주부뿐이라니. 더 다양한 어른 여성상을 제시하는 것이 현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68p.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일에 성별은 큰 의미가 없어. 누구나 사람이기 때문에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면 도와야 하는 거야.

    79p. 완벽한 소년의 등장이 완벽하지 않은 소녀의 약점을 더 잘 드러나게 하는 것 같았거든.

    근래에 유행하던 드라마 설정을 생각해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문제는 이 전에는 완벽한 남자주인공과 가진 것 없는 덤벙이 여자주인공의 조합이었다면 이제는 가진 것 많고 완벽한 여자주인공과 뭣도 없는데 나이도 많은 남자주인공의 조합인 점이 우려스럽다. 출산지도까지 만들었던 이 나라의 맥락을 보면 그 의도가 빤히 보여 불쾌하기만 하다. 저출산의 이유가 여성들이 눈이 지나치게 높다는 점을 드는 것을 보며, 그 현상을 타파하기 위한 해소책으로 이런 유형의 커플들을 대충매체에 전시용으로 재생산하는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126p. 동화는 사람들이 흔히 말했듯 아이들이 읽는 쉬운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들이 처음으로 접하는 놀라운 세상이야. 그러니까 동화는 ‘세상을 바라보는 첫 시선’을 가르쳐 주는 소중한 이야기인 거야.

    174p.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설득당해 온 이야기를 의심해 보자는 의미야. 누구의 입장에서 어떤 마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썼는지 말이야. 그럼 설득하려는 사람의 의도도 조금은 헤아려 볼 수 있을 테니까.

    동화에 대한 내 패러다임을 완전히 깨부숴버렸다. 기존 세대의 시각을 바꾸는 것은 그들이 살아왔던 시간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힘들다. 이 시대의 새로운 세대들은 재미와 자기를 추구하는 세대이기에 의미만 가지고 접근하기 힘들다. 양 쪽이 모두 막힌 막다른 길에서 세상의 변화를 위해 어떤 돌파구를 뚫어야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동화’가 세상을 바라보는 첫 시선을 가르쳐주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하나의 탈출구를 발견한 기분이다. 나 역시도 어렸을 때 수많은 효녀, 조신한 며느리의 틈 바구니사이에서 용기 있게 문제를 해결하는 남자 주인공을 보면서 간신히 용기에 대해 배웠다. 그들이 문제를 마주하고 해결하는 것을 보며, 재치와 문제해결력, 그리고 지혜를 배웠다. 나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었지만, 이제는 안다. 나와 성이 다른 주인공을 통해야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존재하다는 건 이상하다는 것을. 우리는 성별에 상관없이 뭐든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특정 성별에게 특정 역할이 주어지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봐온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 내면화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더 다양한 캐릭터가 나오는 동화가 필요하고, 충분히 개성있는 역할이 골고루 분배되어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동화 문화를 만들어가는 일에 내가 사용되기를 바란다

    180p. 더구나 개가 아닌 어린아이를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에도 인간의 이기심이 묻어나 있어. 그러니까 <플랜더스의 개>는 동화 같지만 사실 넬로를 버려둔 어른들에 대한 비판, 인간의 이기심을 그려 낸 이야기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어.

    근래에 동화를 다시 보면서 놀란 점은 동화 속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다분히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독후감에 올렸었던 양치기소년도 마찬가지로, 어른들이 자신의 나이 및 지위를 권력으로 약자인 아동들을 대하는 태도가 잔인하다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 오늘 읽은 논문처럼 어른들은 동화를 통해 어른들이 생각하는 좋은 아동상을 아이들에게 은근슬쩍 강요한다. 강요하는 와중에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혹은 의도하여 좋은 여성상, 남성상을 구분하고 있지는 않은지 분별하여 재생산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188p. 이후 파랑과 분홍,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은 미국에서 판매 마케팅의 전략으로 사용되었다고 해. 분홍색의 바비인형은 여자아이들에게 인기 있었고, 해군복의 네이비색이 남자아이들의 파란 스트라이프로 사용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거든. 그러니까 우리가 핑크와 블루를 구분하는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거지.

    현재 여자와 남자의 고정관념 역시 대다수 마케팅 산업에 의한 것임을 들었다. 남매 가정일 경우, 누나와 남동생이 같은 장난감을 사용하면 장난감 판매율이 오르지 않으니, 성별을 나눠 장난감을 유행시키고 판매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업들은 본인들의 물품을 판매하기 위해 ‘불행 마케팅’을 펼친다. 이걸 사지 않으면, 이걸 먹지 않으면, 이걸 가지지 않으면 나는 불행하고 완벽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광고에 넣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대다수의 여성들이 빠져나오지 못하는 늪이다. 내가 필요하지 않음에도 이걸 사면 행복할 것 같아서라는 이유로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다. 특히 소확행, 가심비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우리는 작은 것에 만족하고 그래야만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대중매체의 설득에 넘어갔다. 모 유투버의 말마따나 우리는 더 큰 것을 바라며 살아도 된다. 지금 마카롱 하나(개인적으로 핑크택스 대표 주자) 사는 것을 참고, 그 돈을 모아서 내 집, 내 차를 마련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흔히들 ‘남자의 로망’으로 내 집 마련, 자동차를 말하는데 그 로망이 남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기억하자.

    189p. 스페인 동맹 파업의 슬로건인 ‘우리가 멈추면 세상도 멈춘다’를 가져온 우리나라의 ‘여성소비총파업’은 그동안 여성을 수동적인 소비자로만 여기는 인식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 할 수 있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도 현재 어떤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관심을 제대로 두지 못했던 것 같다. 하루 종일 교회에 있는 만큼 교회 내 카페에서의 음료와 쿠키가 낙이었는데, 내가 마실 음료를 미리 집에서 담아오고, 나눠 먹을 간식을 미리 집에서 준비해와야겠다. 세상을 멈추는 ‘우리’에 나도 힘을 보태주고 싶다.

    192p. 물론 살인이 잘못되었다는 건 모두가 인정했어. 주된 이야기는 여자가 남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해 아니 들어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어. 여친이 있는 친구들은 종종 여친이 마음대로 하거나 자신의 말대로 해주지 않을 때 화가 난대. 무시당한 것 같다는 거야.

    여자가 남자의 말을 들어야하나? 짧은 삶이지만 여자는 순종적이어야하고, 애교 있어야 하며, 싹싹해야한다는 고정관념에 치여 가장 고생한 곳은 단연 사회생활에서이다. 특히 사무실 내 어린 나이로 입사한 ‘여’직원이다보니 다들 나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었고, 나는 그게 불편했다. 만만해보이지 않겠다는 일념 하에 메신저 및 전화상으로 이모티콘 사용을 자제했고, 일명 ‘다나까’ 말투를 사용했다. 그러나 일을 할수록 나를 직원 대 직원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여동생쯤으로 느끼는 듯한 태도에는 환멸이 나기도 했다.

    가장 화가 났던 때는, 나와 메신저를 주고받던 남직원이 나에게 ‘엄하게 혼낼라 그랬는데’ 라는 쪽지를 보냈을 때이다. 심지어 맥락 상 내가 그 사람을 도와준 후였는데도 말이다.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네? 아무도 절 혼낼 수 없어요. 라고 보냈더니, ‘확 그냥’이라고 답장이 왔을 때는 진짜 너무 화가 나서 일을 마저 할 수가 없었다.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무시했음에도 이 일은 나에게 내가 공부해서 시험보고 들어간 직장이라 하더라도 내가 그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데 성별이 영향을 지~~대하게도 미친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건이다.

    214p. 당연히 잘못된 일이 아니지. 너처럼 별이 쏟아진다는 사막의 밤하늘을 보고 싶고, 추운 바람에 온몸을 떨어도 오로라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싶다면, 그래서 오랫동안 준비한다면 누구나 세계일주를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해. 만약 이 여행이 여성에게 더 위험하다면 그건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회가 여성을 위험하게 방치한 것이니 그것을 고쳐야 하겠지.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페미니즘은 개개인을 고치고 부수는 운동이 아니라, 사회 구조를 바꿔나가는 운동임을 다시 한 번 명확히 해야겠다.

    227p. 그렇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가난하고 아픈 이들이 많이 있고 평등한 부를 운운하는 사람들은 이상주의자로 취급당하기 일쑤지. 더구나 가난한 이들이 아무리 발버둥치며 노력해도 형편이 나아지기 힘들어. 그래서 원치 않게 가난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게 되어 버리지. 이렇게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면 이제 누가 나설 차례지?

    의도하지 않았으나 마지막이 질문으로 끝났다. 인권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다들 모두의 인권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노력하거나 실천하는 것에는 모르쇠하기 일쑤다. 개인만이 해결할 수도 없고, 정부에서만으로의 노력으로도 안된다. 그러니까 이건, ‘공동체’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이건 oo의 역할이야!”를 외칠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자리에서, 그리고 내 옆의 사람들과 하나 둘 풀어나가야 한다.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몸부림이 곧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네 문제를 위한 몸부림이기도 하기에.

    봉준호 감독님을 싫어하진 않지만, 오히려 대단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에 그가 말한 수상소감에 의해 지워진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로 독후감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내 발걸음은 어느새 우리의 행진이 되었고, 그것은 곧 이 사회를 움직일 정치적 흐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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